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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심칼럼] 시대를 만들어낸 철의 여인

기자명 : 오양심 입력시간 : 2015-09-11 (금) 14:59

시대를 만들어낸 철의 여인


편집주간 오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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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의여인/마가릿대처

[대한방송연합뉴스]
19세기 영국은 전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어 ‘해가 지지 않은 나라’였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는 속담처럼 영국의 국세는 세계대전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국은 영국병을 낳았고, 철의 여인으로 알려진, 마거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10.13 ~ 2013.4.8)수상은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를 만든 인물이었다.


  그 당시 대영제국은 중산층의 끄나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2차 대전 후 고복지, 고부담 정책과 평등주의가 일반화됨에 따라서 특권층의 의식이 희박해졌다. 무기력, 느린 동작, 방임적인 태도 등이 영국병을 불러온 것이었다. 중산층의 쇠퇴가 원인이었다. 적극성, 과감성, 냉철함, 끈기,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삼아왔던 영국인의 정서가 무너졌다. 1976년에 는 IMF의 금융지원을 받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 것이었다.


  '철의 여인' 대처는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를 만든 인물이었다. 1979년 집권하자마자 저비용과 고효율이라는 경제구조의 전환을 통하여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시장경제 원리를 중시하는 경제 전 부문에 걸친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대처리즘의 골자는 재정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규제 완화와 경쟁 촉진이었다.


  ‘마거릿 대처’는 1979년부터 3연임에 성공하면서 1990년까지 집권하는 동안 5개 노동법을 개정해 노동시장을 개혁했다. 1984년 3월부터 1년 동안 파업으로 버틴 탄광노조를 실업률이 11%까지 높아지는 상황에서도 원칙에 입각해 처리했다. 1차적으로 1980∼1987년에는 공무원 수를 75만 명에서 64만 명으로 11만 명이나 줄였다. 2차적으로 1979∼1989년에는 국영기업 50여 개를 민영화했다. 3차적으로는 ‘빅뱅’으로 불리는 금융개혁을 1986년 단행했다.


   ‘마거릿 대처’를 탄생시킨 것은 가정교육이었다. 그녀의 집안대대로 믿어온 감리교도는 “남에게 기대지 말고, 뭐든 자기 힘으로”였다. 가훈은 “늘 반듯하게, 모범적으로”였다. 물론그녀의 부모님은 감리교도와 가훈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식료품 가게를 경영하던 아버지 ‘알프레드 마거릿’은 시의원이었다. 시장이 되기 위하여 어린 딸을 자신의 정치활동 ‘운동원’으로 키웠다. 1935년의 총선에서 보수당의 승리를 위해 발 벗고 나섰을 때, ‘마거릿 대처’는 겨우 열 살이었다. ‘알프레드’는 딸이 선거운동을 위해 벽보를 붙이고 선전물을 돌리며, 선거사무소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모습이 기특했다. 시간이 나면 딸과 함께 영국의 정치문제에 대해 토론하거나 다른 후보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브리핑도 했다. 시장에 당선된 기쁨을 딸과 함께 맛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서 자연스럽게 정치를 접한 ‘마거릿’은 1943년에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동아리인 옥스퍼드 보수협회에 가입해 활동을 했고, 남다른 열성과 노력으로 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당시 옥스퍼드에는 마거릿 같은 중류 출신은 드물었고, 어려움이라고는 조금도 모르고 자란 상류층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말끝마다 민중과 혁명을 이야기했고, 체제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설쳤다. 하지만 ‘마거릿 대처’는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부와 명예, 독실한 신앙, 가족과 전통에 대한 애착. 미국의 신보수주의 정치인들이 공유했던 정치의 특성과 가치를 존중했고, 신념을 굽히지 않은 것이다.


  ‘마거릿 대처’는 장점이 있었다.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결과 1953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59년에는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의원에 당선했다. 하지만 ‘마거릿 대처’는 정치인으로 단점이 더 많았다. 유머감각이라고는 없었다. 말이 거창하거나 화려하지 못했다. 말수가 적어서 필요한 말만 했다. 연설을 할 때 통계수치와 계량적 지표를 내세우는 까칠한 사람이었다. 당찬 면은 있었지만 강철보다 차가웠다. 다행스럽게도 겸손하지 못한 대선후보들에 식상한 유권자들은 진실한 감정표현을 한 그녀의 단점을 장점으로 받아들였다.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의원이 되었고, 주택장관, 연금장관, 재무장관, 에너지장관, 교육장관, 교통장관 등으로 영국에 의한 영국을 위한 사람이 되었다.


  ‘마거릿 대처’는 총리가 되어 긴축재정을 실시하여 영국의 경제부흥을 이룩했다. 포사유화와 노조의 와해, 교육·의료 등 공공분야에 대한 대폭적인 국고지원 삭감 등 획기적인 정책 추진과 독단적인 정부운영 등의 역할로 최선을 다했다. 보수당 최초의 여성 당수, 영국 최초의 여성 수상, 최초의 민선 여성 최고통치자가로 손색이 없었다. ‘철의 여인’은 ‘마거릿 대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여러 임기기간 내내 자신의 진면목을 아낌없이 보여준 ‘마거릿 대처’는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시대를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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