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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순시인, 물소리를 밟다

기자명 : 오양심 입력시간 : 2017-09-07 (목) 13:10


 

[선데이타임즈 오양심주간] 정홍순시인은 충남 태안 남면에서 태어났다. 2011년 <시와 가람>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4년 문학의 전당출판사에서 <뿔 없는 그림자의 슬픔>이라는 첫 번째 시집을 출간했으며, 2017년 시인동네출판사에서 <물소리를 밟다>라는 두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


정홍순 시집.png

정홍순시인은 ‘참말’을 ‘신봉’하는 자신의 시작 방향을 작품을 통해 강력하게 드러낸다. <물소리를 밟다>라는 이번 시집은 그가 기억했던 것, 채집하고 연구했던 것들로부터 ‘참말’이 평범하게 일상을 줄 놓던 시절을 복원하고자 한 결과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정 시인의 작품은 자신의 가장 아픈 가족사에서 출발해서 그가 기억했던 집과 고향, 그리고 사라져가는 옛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동화처럼 그려내어 그 향취가 물씬 풍긴다. ‘참말’을 ‘신봉’하는 자신의 시작 방향을 작품을 통해 강력하게 드러낸다.


게다가 한이 서린 남도의 판소리가락을 넘나드는 토속적인 사투리로 엄마 품과 흡사한 고향이미지로 각인되고 있는가 하면 백제의 방언들이 수수하게 전해지는 등 따스하다 못해 강열하게 표출되기도 한다. 


[해설/ 백인덕시인] 참말로 ‘참말’하기에 대한 경이(驚異)

1.
아무도 슬퍼하지도 염려하지도 않는 일이 있다. 세상에 끔찍한 사건이야 매일 다반사지만, 그래서 우리의 존속(存續)과 번영(繁榮)과는 아주 무관해 보이는 사실이 있다. 세계가 말 그대로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사라진 언어가 수만 개에 이른다는 것이다. 대체로 표기할 문자를 획득하지 못한 구전(口傳) 언어가 대부분이지만, 문제는 정보를 빛의 속도로 주고받게 되면서부터 표기문자를 가진 언어조차 멸종의 위험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입말의 멸종은 단순히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말을 잃은 존재는 자기 정체성이라는 당대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과 풍습, 역사의 고리에서 끊어져 마치 벼락 맞아 생겨난 존재처럼 아예 ‘고향’이 아니라 ‘고향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떠돌이가 될 수밖에 없다.


정홍순 시인은 거의 집념에 가까운 의지로 시적 호불호(好不好), 즉 평판 따위에는 아예 귀를 닫아버리고 오로지 그의 ‘참말’을 사랑하는 자세로 시작(詩作)을 지속한다.


나는 고향 말을 신봉한다
내 귀에 새겨진 이름들이
나를 느끼며 살게 하는 혼령이시다
언어가 하나이던
시날 평지는 나와 상관이 없다
내 조상의 말, 짐승들을 부르고
산천초목을 부르고 신을 부르며 사는 말이
내게는 참말이다
가령 너무 슬픈 꽃이어서
꽃의 비녀 떼고
옥잠화를 옥자마로 불러도
나는 틀린 말을 믿는 것이다
하여 철목에 묻어와 귀화한 꽃을
망초, 개망초 하지만
내 고향에서는 신나는 나물이고
소의 밥이었다
할미초 또한
안달곶 얼크러진 시퍼런 물풀을
난 풍년초로 상속받는다
꽃가마 덩실거리던 궁샘
매끌매끌 퍼렇게 자라는 풀 헤치고
두레박 차게 길러
고수레, 고수레 풍년을 빈다
나의 판수여

―「풍년초」 전문


시인은 단호하다. “나는 고향 말을 신봉한다”고 명제적으로 선언한다. 무릇, 모든 명제는 일종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어야만 한다. 즉 자기 전제를 자기가 참되게 만들어야 한다.


시인은 “내 귀에 새겨진 이름들이/나를 느끼며 살게 하는 혼령”이라고 근거를 댄다. ‘혼령’은 비사실적으로 느껴지지만 ‘내 귀에 새겨진 이름들’이기 때문에 그 어떤 논리적 귀결보다 강력하고 아름답다. ‘시날 평지’(구약에서 바빌론 탑을 쌓았다)는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인데 이 또한 적절하다.


이제 언어는 ‘표준어/지역어’의 구분을 넘어 하나의 코드(code)로 집중되고 있다. 디지털이라는 화려한 기술적 날개를 달고. 하지만 시인은 이를 결단코 거부하는 자세를 드러낸다. “내 조상의 말, 짐승들을 부르고/산천초목을 부르고 신을 부르며 사는 말이/내게는 참말이다”라고 오히려 ‘신봉’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누구는 여기서 언어의 원시성, 또는 작품의 끝 행에 등장하는 ‘판수’와 결합하여 시인이 샤먼적 성격을 지녔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조차 작품 가운데 ‘가령’ 이후에 예시로 사용된 ‘옥잠화’, ‘할미꽃’의 용례를 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마지막 행 “나의 판수여”라는 호격 종결인데, ‘나의’라고 했으니 시인 자신일 리는 만무하고, ‘판수’는 사전적 도움이 좀 필요했다(충남 지방에서만 주로 사용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이 글에서는 시인의 이런 일종의 기획(企劃)이 매우 정당하고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인 자신이 자각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기로 한다.


시인은 ‘참말’을 ‘신봉’하는 자신의 시작 방향을 작품을 통해 강력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번 시집은 결국 이런 시작 태도와 방향에 따라 제작, 구성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정홍순 시인이 이번 시집에 풀어놓은 여러 양태들을 어설프게나마 갈래 묶으면서 그 특질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나름 한 방편이 될 것이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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