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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수필] 충정의 고개, 오공치 전망대에서

기자명 : 최치선 입력시간 : 2017-09-05 (화)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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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 그리고 일본은 자국의 안보와 실익을 내세우며 한반도에 전운의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특히 북한의 6차 핵실험에 따른 세계 각국의 반응과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이러한 시점에서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위치한 오공치 (오금재)는 충정의 고개로 지난 역사를 되 뇌이게 할 뿐 아니라 후세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오공치는 낙안읍성과 낙안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금전산을 비롯한 오봉산, 제석산, 존재산, 백이산, 고동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군사, 문화적 요충지라고도 할 수 있는 장소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이곳 오공치는 나라를 걱정하는 장군들의 고뇌가 서려있다. 처음으로 이곳에 토성을 쌓고 왜적을 물리쳤던 김빈길 장군의 숨소리는 물론 석성을 쌓고 당시의 신도시를 조성해야만 했던 임경업 장군의 숨소리가 들린다. 아니 정유재란당시 백의종군으로 수군의 병기와 식량 등을 마련하고자 명량해전의 청사진을 그렸었던 이순신 장군의 심호흡소리도 오금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잠시, 구국충정을 불살랐던 옛 장군들의 일면을 살펴볼까 한다.


김빈길 장군은 낙안군 낙안면 옥산부근에서 1369년에 태어났다. 약 640년 전의 일로 이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낙안군 지역이 피폐하고 혼란스러웠다. 그는 1394년 낙안군 지역에서 전라도 수군첨절제사로 임명받아 경상도 사천앞바다까지 출전해 왜적을 무찔렀다. 사료를 보면 “태조 3년(1394) 왜적을 섬멸한 전라 수군첨절제사 김빈길에게 물품을 하사하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후, 1397년 왜구와 맞서기 위해 현재의 낙안읍성을 흙으로 쌓았다.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약 30여년 후인 1426년에 그 토성을 근거로 다시 석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대략 현재 낙안읍성의 모습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관직을 버리고 낙안군 백이산 부근에 망해당이라는 정사를 짓고 노후를 보내면서 낙안군 지역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낙안팔경 : 망해당기)인 금강모종, 백이청풍, 보람명월, 옥산취죽영, 징산숙로, 평지부사, 단교어화, 원포귀범은 이 지역의 대표적인 한시로 유명하다.


문무를 겸했던 김빈길 장군은 낙안 태생으로 의병을 모아 수만의 왜구를 무찌르고 처음으로 낙안읍성을 토성으로 쌓은 인물. 전북 사진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여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혜였다.


아마도 낙안읍성의 당시의 신도시는 약 300년이 지난 후 임경업(1594∼1646)장군이 인조 4년(1626년)에 낙안군수로 부임해 왔을 때, 낙안읍성 중수에 관여한 역사적 사실위에 전승자들의 임경업에 대한 지지가 결합해 “오뉘힘내기” 유형의 성 쌓기 설화가 전승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 설화는 오누이의 정을 바탕으로 누이의 지혜와 임장군의 도술, 축지법, 주문 등을 내세워 임 장군을 영웅시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성 주변에는 굵은 돌과 바위들이 그 증표로 남아있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 백의종군하면서 수군재건의 교두보가 됐던 곳도 낙안읍성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낙안성에 들려서 명량해전을 치루기 위한 군사물자와 병사 등을 모으는데 안간 힘을 쏟았으며, 전략까지도 구상했다는 사료와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일찍 떠나 낙안에 이르니 많은 사람들이 5리나 나와서 환영해 주었다.”-중략-“관리와 촌민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와서 보았다. 오후에 길을 떠나 10리를 오니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져서 다투어 술병을 바치는데 받지 않자 울면서 억지로 권했다.”- 정유년(1597년 8월 3일자) 난중일기-


이순신 장군이 옥과를 떠나 순천시 주암면 창촌리에 위치한 부유 창에 도착을 했다. 물론 여기서 군량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지만, 이미 이곳은 불에 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낙담했을 터이지만 겉으로는 표시하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과 휘하 장졸들은 이곳에서 아침밥을 먹고, 곧 이어 낙안읍성으로 향한다. 그러다 이곳 낙안향교를 지나갈 때 그곳의 민초들이 “우리 장군님! 오시네”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 장군 일행을 환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김빈길 장군도, 임경업 장군도, 이순신 장군도, 아니 3.1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도, 모두가 이 오금재(오공치)에 올라서서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고 걱정했었던 고개다. 지금도 필자의 지인들은 이 고개의 전망대에서 어수선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해 본다.


이야기 같고 전설 같은 지난 역사의 뒤안길이다. 하지만 오공치(오금재)의 전망대에서 낙안읍성과 낙안들 그리고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줄렁을 바라보면서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국가의 장래를 그려봄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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